천추세인

3편까지 천마의 감정선에 대한 단상 (스포일러 주의)

연소저 2021. 2. 18. 19:15

(2년 전, 원작을 읽기 전, 드씨도 3편까지밖에 못들은 상태에서 작성한 글을 말투만 살짝 수정해서 올리는 것임을 감안해 주세요ㅎㅎㅎ)

 

------------------------------------------------

 

문평은 '우연히' 승효와 동행하게 되면서 승효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윤승효는 천성이 밝은 사람인 듯했다. 그는 농담을 좋아했고, 자주 웃었으며 사사로운 대화 또한 몹시 즐겼다"

 

그런데 이 평가는 승효가 아니라 천마에 대한 것이라는 점을 깨닫고 이마를 탁 치게 됐고 이 글을 쓰게 됐다.

 

그 전까지 천마와 문평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마교 내에서는 까마득히 높은 교주와 일개 하급무사 사이인데다
천마 입장에서는 제자들이 불순한 의도로 자기한테 붙인 꼬리이니
말 한 마디 다정하게 건네지 않고 잡초라며 기껏해야 희롱이나 했을 테고
문평도 뻣뻣하게 굴고 맘속에 있는 이야기 1도 안 했을 테니까
둘 사이에 무슨 감정교류가 있을 수 있었겠는가ㅠㅠㅠ

(문평이 말이 좋아 마영43호지 포영의, 호완평은 물론 같은 마영한테까지
교주님이 쓰다버릴 걸레짝보다 못한 취급 받았고ㅠㅠ
천마도 1편 후반 가면서 문평을 점점 아끼는 게 보이기는 했지만
연인으로서 마음에 품었던 건 아니었다고 봄)

그런데 (절대 우연은 아니지만) 길에서 우연히 만난 동행으로 부담없는 사이가 되니까
천마는 위에서 문평이 묘사한 것처럼
문평과 농담하고 자주 웃고 사사로운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ㅠㅠㅠ 천마도 얼마나 즐거웠을까ㅠㅠㅠ

원작도 읽지 않은 채 드씨를 첫귀했을 때는 문평 나레이션으로 진행되다 보니

천마 감정선이 너무 갑자기 뛰는 거 아닌가 왜 갑자기 저토록 절절하게 진심이 된 걸까

약간 의아한 부분도 없지 않았다.

나한테 천추세인 '최대반전'은
승효의 탈을 쓴 천마도 아니고, 옥기린의 탈을 쓴 곽효도 아니고 (물론 그 장면들에서도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랐지만!)
짭승효의 정체를 알아챈 문평에게 천마가 입덕부정 하지 않고 바로 직진하는 장면, 3-7이었기 때문에!!!

첫귀 때는 내가 뭘 들은 거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거의 문평이 빙의 수준이었달까
천하의 천마가 일개 하급무사 따위한테 그렇게 순순히 자기 감정 고백할 줄 상상도 못했었다 ㄷㄷㄷ

아예 아직 자각을 못한 단계라서 입덕부정을 하거나
자각을 했더라도 아직은 미미한 단계라서 적어도 문평이 앞에서만이라도 숨길 줄 알았는데
정체는 속였어도 진심을 속인 적은 없다라니ㅠㅠㅠ 뒤통수가 얼얼할 정도의 반전이었다!!!!

 

(이후에 원작을 읽어보니 3-7에서도 천마가 완전히 진심은 아니고 반쯤 장난이었던 것도 부정할 수는 없으며,

협잡과 계략에 능한 마도인으로서 문평을 흔들기 위해서는 '진심'을 내세우는 것이 최선이라 그랬다는 걸 알게 됐지만ㅋㅋㅋ 그래도 반은 진심이었다는 거니까 뭐ㅋㅋㅋㅋ)

교법을 어겨 목을 베도 시원찮을 놈이 자기한테 바락바락 대드는데 살려주는 것도 모자라
교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나는 너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진심이었다 고백을 한 걸까...
그냥 대충 혼내고 지금까지처럼 몸만 취해도 되는 거였는데...

문평이가 승효한테 반하니까 질투하는 감정이 생긴다는 건 알겠다.
근데 그건 그냥 자기 소유물이 딴 데 눈 돌려서 화난다 혼내줘야 되겠다는 정도 아닌가?
그걸로 80 넘은 교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평생의 첫사랑을 하게 된다는 게 뭔가 부족하다 싶었는데...

"윤승효(천마)는 천성이 밝은 사람인 듯했다. 그는 농담을 좋아했고, 자주 웃었으며 사사로운 대화 또한 몹시 즐겼다"

이 한 문장으로 다 설명이 되는 느낌이었다ㅠㅠㅠ

어린 시절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천성이 밝은" 아이였을 천마가
떠올리기도 싫을 그 날부터, 살부지수를 아버지라 부르며 어쩔 수 없이 복종하고 교모에게 ㄱㄱ 당하면서도
복수할 수 있는 힘을 가지기 위해 죽도록 수련을 했을 테고

천하제일인이 된 이후에도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혈육도 친구도 없이
그저 마교의 세를 키우고 유지하고 제자 키우고 후계 계획 세우느라
만명이나 되는 마교를 이끌면서도 정작 내 사람이다 싶은 사람은 변변히 없지 않았을까ㅠㅠㅠ

누군가와 상하관계가 아닌 대등한 관계에서, 혹시 저 자가 나를 배신하는 건 아닐까 의심하지 않고,
허심탄회하게 웃고 떠들고 농담하고 이런 건 천마로서도 이번이 거의 처음이었을 것 같다ㅠㅠㅠ

게다가 그 상대가 본인의 취향 100%의 외모에, 육체적으로도 80 평생 가장 큰 즐거움을 주는 문평인데,
교에 있을 땐 뻣뻣하게만 굴던 그 문평이가 (어느 정도 예는 차리겠지만) 자기를 무서워하지도 싫어하지도 않고
자기만 바라보고 시덥잖은 농담에도 웃어주고 속에 있는 이야기도 털어놓고 이러니까
이게 승효를 향한 감정이라 괘씸하면서도 '문평이라는 사람' 자체에 본인도 모르게 빠져드는 걸 막지 못했을 듯ㅠㅠㅠ

나레이션에도 나오지만 천마는 위선자 위군자를 혐오하고,

의를 중시한다는 정파 인간들의 이중성에 치를 떠는 사람인데
문평은 겉과 속이 너무나 투명하고, 뼛속까지 선하고 다정한 사람이다.

자옥이한테 하는 거나 자묘랑한테 호구짓하는 것을 보며 지 팔자 지가 꼰다고 타박해도
결국 천성이 착하디 착하고 솔직하고 자기 감정도 못 숨기는 문평이한테 끌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ㅠㅠㅠ

문평 시점이 많으니 듣는 사람은 알기 어렵지만

사랑에 빠진 문평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울지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지ㅠㅠㅠ

이미 천마는 그 사랑스러운 문평과 "농담하고 웃고 사사로운 대화"를 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알아버던 것이다.

그리고 "농담하고 웃고 사사로운 대화"를 한다는 건,

아마도 인류가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러했듯,

'연애'의 또다른 이름인 것.

천마가 문평에게 이것저것 챙겨주고 말고삐도 자기가 맨다 하고 예쁜 옷도 사입히고 했던 것...
처음에는 분명히 승효를 역용하고 있으니 자기 평소 성격과는 달리 위군자인 윤승효 흉내를 낸 것이었겠으나
자기가 다정하게 대할수록 볼품없었던 잡초가 마음을 열고 꽃을 피우는 게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나중에는 진심으로 그랬을 거라고 확신한다.

물론 꽂을 피우는 상대가 윤승효라 빡치기도 했겠지만;;
빡치는 마음만 있었다면 더이상 다정하게 대해주지 않고 철벽을 치면 그만이었을 텐데
천마는 문평에게 들킬 때까지 (심지어 들킨 이후에도!!) 다정하게 대해줬다! <- 그것은 트루럽ㅠㅠㅠ

게다가 승효천마는 우연을 가장해 문평을 다시 만난 후 문평이 고백하기 전까지
한참을 ㅅㅅ는 커녕 이렇다할 스킨쉽도 없이 보냈는데
(몽중십야 때는 불가피한 의료행위 였으니 제외!! 천마 본인도 승효의 몸으로 그러는 것이 정말 내키지 않는다고 했었고ㅋㅋ 문평 고백 이후로 내가 왜 이놈을 그동안 그냥 내버려둔건지 본인도 의아할 지경)

천마가 그 금욕기간 동안 뭔가 정서적인 교류만으로 사랑에 빠지게 된 거 같아서 더 설렌다ㅠㅠㅠㅠ

+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318에서 둘이 함께 말을 타고 옛날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저 시절 둘의 대화와 비슷한 분위기였지 않을까 생각되면서 또 과몰입되는 것이다ㅠㅠㅠㅠ 이제 다른 사람의 정체를 빌리지 않고 온전히 천마와 문평으로서도 농담을 하고 웃고 사사로운 대화를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에ㅠㅠㅠㅠㅠ